마리안 스포어 부시: 영혼의 예술가

마리안 스포어 부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영매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슬픔에 잠긴 많은 미국인들처럼 그녀는 오우ija 보드를 사용하여 감정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새로운 길이었으며, 그녀는 치과의사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치유의 과정이 곧 예술적 경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포어 부시는 오우ija 보드를 통해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비물질적 존재들로부터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고, 이들은 그녀에게 예술을 창작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 영혼들이 그녀가 구입할 색상부터 대형 유화의 주제까지 모든 것을 지시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시작은 잊혀진 비전의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그녀의 작품은 뉴욕의 카르마에서 열리는 "Life Afterlife: Works c. 1919–1945" 전시회에서 조명받고 있으며, 이는 그녀의 첫 전시회로 거의 80년 만입니다.

스포어 부시는 1878년 미시간주 베이 시티에서 태어나 주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분야에서 존경받았고 재정적으로 독립적이었습니다. 그러나 40세가 되던 즈음, 그녀는 20년간의 치과 진료를 접고 예술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오우ija 보드를 통해 메시지를 받았고, 이후에는 고인이 된 예술가들의 영혼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괌으로 이주하여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꽃 정물화를 그렸으나, 1919년과 1922년 사이에 예언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리니치 빌리지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생동감 넘치고 직관적이었으며, 나중에는 전쟁의 임박함을 경고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캔버스로 변화했습니다.

대공황 동안 스포어 부시는 보우리에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며 "보우리의 천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종종 새를 묘사하며, 이는 심판이나 보호를 상징합니다. "The Pawn Broker (Three Vultures)"(1933-34)에서는 두 마리의 독수리가 사슬에 묶인 남자를 향해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스포어 부시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대신 그녀는 홀로 작업한 영적 현대주의자들과 함께해야 할 예술가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죽음은 없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1946년에 사망했으며, 현재의 전시는 그녀의 예술적 유산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Source: www.arts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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